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
서상륜·서경조 형제가 세운 한국 최초의 자생(自生) 교회.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설립되었다. 송천리(松川里)는 소나무가 무성하고 샘이 솟는 마을로서, 우리말로 '솔내'인데 여기서 '소래'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서상륜은 평북 의주 사람으로 만주에서 장사를 다니다 로스 선교사를 만나 1879년 세례를 받고 한글성경 번역자로, 매서인으로 활동했다. 국경을 넘나들며 만주와 중국에서 매서인으로 활동하던 서상륜은 중국 관리에게 붙잡혀 한국 국경 검문소로 넘겨졌으나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일로 그는 고향에 안착하지 못하고 친척이 모여 살던 황해도 송천리로 오게 되었다. 이때가 1884년경이었다. 그는 여기서 친척에게 성경을 소개하며 복음을 전했고,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다음해 1885년 동생 서경조가 합류하여 교인들과 함께 기왓집 여덟 간 짜리 예배당을 건축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이다.
그해 7월 3일 언더우드 목사 집례로 헌당식을 거행하였고 그때 서경조는 초대 장로로 장립을 받아 소래교회는 명실상부하게 당회를 가진 조직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 후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황해노회에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양지캠퍼스에 소래교회를 복원하였다. 참고로, 소래교회 설립 연도에 대해서는 1883년, 1884년, 1885년, 1887년 등 여러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1980년 12월 4일 개신교 11개 교단 대표들이 모여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범 교단적 협의체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1981년 1월 27일 100주년 기념사업 협의회 제1회 총회, 1982년 1월 26일 제2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 협의회에는 한국교회 20개 교단과 26개 기독교 기관단체의 대표 100여 명이 참여하였다.
1983년 11월 14일 새문안교회에서 첫 순교자 추모 연합예배가 개최되었는데, 한국교회 초기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희생정신을 계승하고자 1천여 명의 성도가 참여하였다. 이후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에 11만 평의 부지를 영락교회 성도(정이숙 권사)가 기증하자, 오랜 논의를 거쳐 한국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을 짓고 그 앞에 순교자 기념탑을 건립하기로 결의하였다.
1987년 4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였고, 1989년 11월 18일 건평 336평의 3층 건물로 한국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순교자 기념관 공사비로 1989년 재미 실업가인 한규빈이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1884년 기독교 복음이 전해진 이래 순교자는 2,600여 명으로 추산되며, 이 가운데 600여 명의 명단이 순교자 기념관에 헌정되어 있다.
2005년 4월 23일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 협의회 정기 이사회에서는 순교자 기념관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의 운영 및 관리를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교회에 위임하기로 결의하고, 2005년 7월 10일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교회를 창립하였다. 관장은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교회의 담임목사가 맡게 되었고, 현재 관장은 이재철 목사이다.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교회에는 순교자 기념관 관리위원회가 있는데, 위원회는 매년 3명씩 임명하는 2년 임기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기철목사님의 성경책
합정역에 있는 절두산성지, 양화진 외국인선교묘원을 방문해봤다면
반드시 다음코스로 방문해보아야 할 곳이다.
누가 순교자로 정하고 부르는가. 이곳에 답이 있다.
시간을 잠시 멈추고 생각해봐야할 이야기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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